검은 문을 열자마자 내가 나를 삼키는 꿈.
나는 눈을 떴다. 무언가 시끄럽게 창밖에서 재잘재잘댔다. 이제는 보기도 어려워진 참새 몇마리가 전선에 앉아서 무언가 화제거리로 시끄럽게 이야기하고 있겠지, 싶었다. 오늘 어떤 인간놈이 빵덩어리를 던져주더라, 멍청한 놈. 재잘재잘재잘, 시끄럽기가 그지없다. 총이라도 있었으면 당장에 쏘아버리고 싶은 짜증. 그리고 이미 흐릿해진 꿈의 기억. 어딘가 둔하게 머리가 울리는가 싶어서 이마를 짚어 보았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늘 먹던 두통약이 딱 한알 남아있었으므로, 나는 물도 없이 단숨에 삼켰다. 아무리 어른이라지만 쓴 맛은 싫다.
조금 누워 있자니 곧 알람이 울렸다. 꽤 오래된 하늘색 시계가 시끄럽게 아침 8시를 알리고 있었다. 어젠 하루종일 암야동을 돌면서 괜찮은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았으니, 오늘은 느긋하게 출근해도 되겠다. 알람을 끄고 한참을 누워 있었지만 한번 깨어버린 잠은 다시 쉽게 들지 않아 나는 결국 시계를 다시 확인하고 일어났다. 8시 20분이다. 란이가 가게에 출근하는 시간은 9시 즈음 되니까 역시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란이는 가게 열쇠가 없어서 내가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가지도 못하니, 그러면 자기 같은 여자를 길거리에서 동사 시킬 뻔 했다느니, 시간 개념이 없다느니, 그거때문에 외국인들이 한국 싫어한다느니, 그러다가 유엔까지 끌어들여 나를 한참 쪼아댈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잘 하니까 자를 생각은 없다. 란도 결국에는 걱정으로 그러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래뵈도 30년의 연륜은 녹록치 않은 것이다.
가뿐하게 세수를 하고 머리를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거실에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뎅하고 울렸다. 30분. 조금 빠듯하겠다는 생각에 가볍게 옷을 차려 입었다. 조금 달려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창밖을 내다보면 그새 몇마리 있던 참새녀석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현관을 나서 문단속을 하면서 역까지 오르막길이 있다는 것에 불평했다. 늙은 사람은 공경을 해야 마땅한 지고, 예끼 더러운 길놈. 너는 왜 오르막인 것이냐.
열심히 걷고 뛰고, 러시아워인 통에 좀 낑겨서 전철에 타고보니 8시 반. 조금 아슬아슬하게 도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 놓았다. 지관이는 학교 갈 시간인가, 아니 방학이던가. 멍하니 흔들리다 보면 아리따운 아가씨의 음성이 나를 퍼뜩 깨웠다. 물론 목소리뿐이지만, 얼굴도 이쁠거라고 생각하면서 이러쿵 저러쿵 시끄러운 사람들과 함께 내렸다. 그리고 오늘은 지관이에게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들을까 기대하며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란이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안도하며 나는 코트 주머니 속에서 열쇠고리를 꺼냈다. 열쇠는 딱 네개. 셔터, 가게문, 집, 2층. 그리고 그녀가 선물해준 은반지. 은이라고는 해도 이젠 너무 바래서 예전의 빛은 잃은지 오래였다. 그녀도 이것과 같은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 루비라도 한 알 박아줄 것을, 이젠 너무 늦어버렸다. 이제 그 반지는 유품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간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날, 그 분은 그 작은 반지 하나를 가지고 참 서럽게 우셨었다. 나도 아마 울고 있었을 거다. 어렴풋하게 그녀의 미소가 기억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왠지 쓴 맛이 입안에 퍼졌다. 란이가 오기전에 가게 문 부터 열어야지. 별 시덥잖은 감상은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셔터를 올리고 가게문을 열자 물건에 쌓인 사람과 시간의 냄새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녀가 죽었을 때에도 변하지 않은 특유의 냄새가.
난로를 켰다. 어딘가 나른한 생각이 든 탓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메모지에 지관이가 오면 깨우라고 옆에 있던 볼펜으로 대충 휘갈겼다. 그리고 코트를 벗어 그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구제 소파위에 누웠다. 란이가 좀 늦네.
나는 눈을 감았다. 저 멀리서 검은 문이 보였다.